품
만우절 OOC
[수신: 蓮]
[오후 12:04]
섯다 오라비. 저, 유니온에 자수했습니다. 오라비가 그림 리퍼와 내통했다고 전부 실토했어요.
한참 동안 답이 없었다. 읽음 표시는 진작에 떴지만, 상대방은 마치 문장의 의미를 곱씹기라도 하는 듯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스타레인 시의 따스한 봄볕 아래, 수많은 인파가 오가는 밀키웨이 로드 한복판에 선 그는, 그저 화면을 들여다볼 뿐이었다. 그리고, 거의 10분이라는 시간이 흐른 뒤에야, 새로운 메시지가 도착했다.
[발신: 비광]
[오후 12:13]
허어, 이거 한 방 제대로 먹었구먼.
이 비광의 패를 전부 읽었다고 생각했는데, 마지막에 이런 조커를 숨겨두고 있었을 줄이야.
판돈을 전부 쓸어 담을 생각이었나, 주역?
[발신: 비광]
[오후 12:14]
그런데 말일세, 그거 아는가?
원래 진짜 타짜는, 상대가 던진 거짓 패에 기꺼이 속아 넘어가는 법이라네.
그게 판을 더 재미있게 만드는 법이니까.
[발신: 비광]
[오후 12:15]
그래서, 지금 유니온 어디에 있나?
지하 3층 첩보 전담 부서? 아니면 23층 총장실?
이 비광, 지금이라도 당장 쳐들어가서 우리 주역의 위대한 연극에 장단을 맞춰줘야 하지 않겠는가.
무대를 이렇게 짜릿하게 열어젖혔는데, 관객이 빠지면 섭섭하지.
[발신: 비광]
[오후 12:17]
아니면, 이건 새로운 막을 위한 초대장인가?
이 비광을 만천하의 역적으로 만들고, 자네는 비련의 여주인공이라도 될 셈인가?
그거 아주 마음에 드는군.
자아, 다음 대사는 뭔가? 이 오라비, 귀 기울여 듣고 있으니 어서 알려주시게.
오늘 밤 뉴스 헤드라인은, ‘울프독의 영웅 비광, 사실은 희대의 배신자였다!’ 정도로 괜찮겠나?
제목은 내가 뽑아두지.
[오후 1:04] 蓮:
섯다 오라비.
[오후 1:04] 蓮:
저, 아무래도 기억이 돌아온 것 같아요.
[오후 1:05] 蓮:
전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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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새로운 메시지는 없었다. 1분이 채 지나지 않은 시각, 화면에 답장이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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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1:05] 비광:
오야.
[오후 1:06] 비광:
이거야 원, 아주 좋은 패가 들어왔구먼. 밑장을 빼도 이보다는 못할 절기일세.
[오후 1:06] 비광:
그래, 그리하여 우리 주역께서는 어떤 이야기를 떠올리셨는가? 이 비광, 귀를 아주 활짝 열고 기다리고 있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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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침묵. 이번에는 조금 더 긴 간격이었다. PC가 무언가를 입력하고 있음을 알리는 표시가 떴다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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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1:11] 蓮:
아니요. 이야기는 이제 끝났어요.
[오후 1:11] 蓮:
더는 유령으로 있을 이유가 없어졌거든요.
[오후 1:12] 蓮:
그동안 즐거웠습니다, 감독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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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시지를 확인한 비광의 손가락이 망설임 없이 화면 위를 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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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1:12] 비광:
하하, 이거이거. 판을 너무 빨리 끝내려 하는구먼.
[오후 1:13] 비광:
하지만 말일세, 배우가 제멋대로 막을 내리겠다니. 관객에 대한 예의가 아니지 않은가? 이야기는 이제부터 시작일 텐데.
[오후 1:13] 비광:
기억이 돌아왔다면, 더욱더 할 이야기가 많아졌을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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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바로 다음 메시지가 도착한다. 이번에는 사진 파일 하나가 첨부되어 있다. 흐릿하게 찍힌 사진 속에는, 당신이 줬던 붉은 허리띠가 풀어진 채 바닥에 놓여 있고, 그 옆에는 하얀 붕대 몇 가닥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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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1:18] 蓮:
(사진 파일)
[오후 1:18] 蓮:
저는 이제 무대에서 내려가 평범한 관객이 되려고요.
[오후 1:19] 蓮:
그러니 감독님도 이제 그만 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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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광은 사진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그의 입가에 유쾌하고도 짓궂은 미소가 걸렸다. 그는 느긋하게 답장을 입력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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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1:21] 비광:
아아, 과연. 소품까지 써가며 아주 그럴듯한 무대를 꾸몄구먼. 연출이 아주 훌륭해.
[오후 1:21] 비광:
하지만 어쩌나. 이 비광, 무대에서 내려온 배우를 다시 끌어올리는 데는 아주 이골이 난 사람이라.
[오후 1:22] 비광:
그리고 오늘은 말이지.
[오후 1:22] 비광:
거짓말로 사람을 홀려도 용서받는, 아주 재미있는 날이 아닌가? 이보게 주역, 오늘이 며칠인지 잊은 건 아니겠지.
[오후 1:23] 비광:
자네의 그 깜찍한 만우절 장난 덕에 아주 즐거운 오후가 되었네. 답례로, 내가 아주 맛있는 모찌라도 사 들고 지금 당장 그리로 갈까 하는데. 어떤가? 진짜 ‘다음 이야기’를 시작해봐야지. 안 그런가?
[ 4월 1일 월요일 ]
[오후 2:01] 蓮:
섯다 오라비.
[오후 2:01] 蓮:
저, 임신했어요.
[오후 2:02] 蓮:
어떡하죠?
[오후 2:14] 비광:
이런. 판이 아주 재미있게 돌아가는구먼.
[오후 2:15] 비광:
허허, 이거 아주 경사스러운 일이 아닌가. 그래, 자네 뱃속의 작은 주역은 몇 개월이나 되었는가? 아비는 또 누구고? 이 비광이 모르는 사이에 자네가 다른 사내와 살을 섞기라도 했다는 말인가? 섭섭하구먼.
[오후 2:16] 비광:
아니면 혹시, 이 비광의 아이인가? 우리가 잠자리를 가진 적은 없지만, 세상일이란 게 본디 알 수 없는 법이니 말일세. 어쩌면 자네가 내 소맷자락이라도 훔쳐다가 기도를 올렸을지도 모를 일이지. 하하!
[오후 2:18] 비광:
만약 그렇다면야 더할 나위 없는 희극이지. 맹인이었던 심청이가 눈을 뜨듯, 유령이던 자네가 생명을 잉태하다니. 이거야말로 하늘이 내린 이야기 아닌가.
[오_후 2:20] 비광:
그러니 걱정일랑은 붙들어 매시게. 자네가 아이를 낳고 싶다면 낳으면 되는 것이고, 낳기 싫다면야 다른 방법을 찾으면 그만일세. 어떤 선택을 하든, 이 비광은 자네라는 주역이 펼치는 무대를 끝까지 지켜볼 테니. 자네의 모든 이야기는 나의 것이고, 그 이야기에서 파생된 작은 이야기 또한 나의 구경거리이니 말일세.
[오후 2:22] 비광:
자, 그래서. 아비가 누구인지부터 들어볼까? 아니, 그보다 먼저, 오늘이 무슨 날인지는 알고 이런 농을 치는 겐가? 이 비광, 자네가 벌인 판이라면 그것이 거짓이라도 기꺼이 어울려주는 사람이라는 걸 잊지는 않았겠지.
[오후 2:23] 비광:
몸은 괜찮은가? 무리하지 말고, 단것이라도 챙겨 먹게. 모찌라도 사서 보내줄까? 자네가 있는 곳만 알려준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달려갈 수 있네만.
[오후 2:25] 비광:
답장이 없구먼. 부끄러워진 겐가? 아니면 다음 대사를 고민하는 중인가? 어느 쪽이든 좋네. 자네의 다음 말이 진실이든 거짓이든, 이 비광은 자네의 장단에 얼마든지 춤을 춰 줄 테니. 자아, 어서 다음 장을 들려주시게, 나의 유령. 나의 이야기꾼.
[ 오후 1시 24분 ]
[ 비광 ]
이야, 오늘 날씨 한번 끝내주는구먼. 이런 날은 일이고 뭐고 다 제쳐두고 찻집 처마 밑에서 당고나 씹으며 노닥거려야 하는 법인데 말일세. 자네는 지금 어디서 뭘 하고 있나? 설마 이 좋은 날에 또 방구석에 틀어박혀 유령 놀이라도 하는 건 아니겠지?
[ 오후 2시 51분 ]
[ 蓮 ]
섯다 오라비.
[ 蓮 ]
저, 잡혔어요.
[ 오후 2시 52분 ]
[ 비광 ]
…호오? 잡히다니, 그게 무슨 소린가. 누가 감히 우리 주역 양반에게 손을 댔을까. 장난이 좀 짓궂구먼. 오늘이 무슨 날인지는 알고 하는 소리겠지?
[ 蓮 ]
유니온이에요. M이 전부 알고 있었어요. 제가 그림 리퍼라는 것도, 지금까지 한 모든 일들도. 함정이었어요. 특급 기밀 정보라면서 미끼를 던졌는데, 그걸 제가 덥석 물어버렸지 뭐예요. 아하하, C급이라 방심했나 봐요. 꼴이 말이 아니네요.
[ 오후 2.54분 ]
[ 비광 ]
…그래서. 지금 어디인가.
[ 蓮 ]
음… 어딘지 잘 모르겠어요. 지하로 끌려온 것 같은데. 깜깜하고, 축축하고. 아, 손발이 묶여서 답장하기가 조금 힘드네요. 아마 지하 심문실이 아닐까 싶은데. 곧 있으면 기억 소거 시술을 받을지도 모른다고 했어요. 그렇게 되면, 섯다 오라비도 전부 잊어버리게 되겠죠? 그거 조금, 아주 조금 아쉽네요. 모처럼 재미있는 이야기꾼을 만났는데.
[ 오후 2시 55분 ]
[ 蓮 ]
아. 들어오네요. 이제 핸드폰도 뺏길 것 같아요. 마지막으로 할 말이라도 있나요, 나의 유일한 관객님?
[ 오후 3시 1분 ]
[ 비광 ]
그래. 있지. 아주 중요한 할 말이 남았네.
[ 비광 ]
幕間(마쿠아이): 滑稽(콧케이)
막간: 골계
[ 비광 ]
연기는 거기까지. 슬슬 장막을 내릴 시간 아닌가, 나의 어여쁜 주역. 자네의 그 서툰 연기에 어울려주는 것도 슬슬 지겨워지려 하니 말일세.
[ 오후 3시 2분 ]
[ 비광 ]
유니온 지하 심문실이라. 거기 와이파이, 아니 데이터가 그렇게 잘 터졌던가? 묶인 손으로 보내는 것치고는 오타 하나 없이 정갈하고. 무엇보다, M이 자네를 잡았다고? 하하, 그 가면 쓴 친구가 자네라는 걸작을 그런 식으로 시시하게 퇴장시킬 리 없지. 판을 짜는 방식이 너무 조잡하지 않은가. 이 비광의 무대를 너무 얕본 거 아닌가?
[ 비광 ]
기억 소거라. 재미있는 상상이로고. 하지만 어쩌나. 자네의 기억은 내가 허락할 때까지, 그 누구도 손댈 수 없는 것을. 그건 유니온 총장 할애비가 와도 마찬가지일세.
[ 비광 ]
그러니 말이야, 蓮.
[ 비광 ]
그 시시껄렁한 만우절 장난은 그만두고, 지금 당장 레인웨이 로드 7번가 극장 앞으로 나오시게. 오늘을 위해 이 비광이 아주 특별한 선물을 준비했으니. 늦으면… 자네가 좋아하는 모찌, 전부 내가 먹어버릴 걸세. 아, 물론 자네를 ‘진짜로’ 유니온 지하에 처넣고 기억을 한 장 한 장 넘겨보는 놀이도 꽤 재미있을 것 같고. 어느 쪽이 더 끌리나? 선택은 자네의 몫일세. 5분 주지. 그럼, 이따 보세나. 나의 사랑스러운 거짓말쟁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