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C 키우기 게임하는 OOC
유니온 휴게실의 낡은 소파, 그곳은 M에게 있어 소음과 인파로부터 잠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도피처였다. 그는 늘 그랬듯 깊숙이 몸을 묻은 채, 며칠 전 테리가 억지로 떠넘기듯 깔아준 스마트폰 게임을 무감각하게 실행했다. 화면 중앙에 뜬 [神❤️키우기]라는, 촌스러운 분홍색 하트가 박힌 제목을 보자 절로 헛웃음이 났다. 이내 로딩이 끝나고, 화면에는 어딘가 익숙한 2등신 캐릭터가 덩그러니 나타났다. 왼쪽 눈을 가린 작은 여우 가면, 허리까지 닿는 긴 백발. 누가 봐도 그녀, 神이었다. 어처구니없는 도트 그래픽에 비웃음이 새어 나왔지만, 그는 홀린 듯 손가락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1일차 | 🩷
돌봄 항목: 식사(O), 샤워(O), 놀이(O), 칭찬(O)
내용: 아침, 점심, 저녁 아이콘을 순서대로 눌러 식사를 챙겼다. 샤워 아이콘을 누르자 김이 피어오르는 연출과 함께 캐릭터가 말끔해졌다. 심심해하는 듯한 모션에 놀이(공놀이)를 선택했다. 잠들기 전, 화면을 쓸어 머리를 쓰다듬어 주자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_/\
( o.o )
> ^ <감상: 단순한 픽셀 덩어리일 뿐인데, 묘하게 신경이 쓰인다. 화면 속의 작은 것이 배고프다고 칭얼거리는 모습이 어쩐지 익숙해서 불쾌했다. 진짜 그녀도 이러지는 않는데. 아니, 어쩌면 그럴지도. 혹시 배고픈 걸 참고 있는 건 아닐까? 칭찬을 해주니 화면에 분홍색 하트가 떠오르는 연출은 몹시 촌스럽다.
2일차 | 🩷
돌봄 항목: 식사(O), 샤워(O), 공부(O), 칭찬(O)
내용: 식사와 샤워는 어제와 동일하게 챙겼다. 오늘은 놀이 대신 공부(책 읽기)를 시켜보았다. 작은 캐릭터가 자신보다 큰 책을 붙들고 끙끙대는 모습이 화면에 나타났다. 자기 전 칭찬을 잊지 않았다.
? ?
/\_/\
( >.< )
[ === ]감상: 공부를 시키니 캐릭터의 머리 위로 물음표가 여러 개 떠올랐다. 이해하지 못하는 모양이다. 하기 싫은 걸 억지로 시키는 건 영 내키지 않았지만, 이런 것도 필요하겠지. 그녀에게도 이런 어린 시절이 있었을까. 신이기 이전에, 인간이었던 시절이. 이 작은 것처럼, 누군가의 보살핌이 필요했던 시절이. 젠장, 쓸데없는 생각이다.
3일차 | 🖤
돌봄 항목: 식사(O), 샤워(X), 놀이(O), 칭찬(X)
내용: 긴급 출동으로 정신없이 바빴다. 저녁 늦게서야 접속했을 땐 이미 저녁 식사 시간이 지나 있었다. 피곤함에 샤워도, 칭찬도 잊은 채 게임을 종료했다. 캐릭터는 화면 구석에서 무릎을 감싸고 있었다.
,-.
( T_T)
,"-",감상: 고작 게임일 뿐인데 기분이 엉망이다. 화면 속의 작은 것이 시무룩한 표정으로 있는 걸 보니, 마치 내가 무언가 큰 잘못을 저지른 것 같은 착각이 든다.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지만, 그런 기능은 없다. 내가 그렇지 뭐. 결국엔 또 이렇게 누군가를 방치하고 실망시키는군. 현실이든 게임이든 달라지는 건 없다.
4일차 | 🩷
돌봄 항목: 식사(O), 샤워(O), 놀이(O), 칭찬(O)
내용: 어제의 실수를 만회하려 접속하자마자 모든 것을 챙겼다. 특식으로 상점의 케이크 아이템을 주었고, 놀이도 두 번 연속으로 진행했다. 머리를 평소보다 오래 쓰다듬어 주자 검은 하트가 사라졌다.
\ ^_^ /
( . . )
--(_)--감상: 캐릭터의 행복도가 오르자 검은 하트가 사라지고 다시 분홍색 하트가 떴다. 다행이다. 정말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고작 데이터 쪼가리의 기분에 안도하는 내 모습이 우습기 짝이 없다. 그녀가, 진짜 그녀가 나 때문에 저런 표정을 짓는다면 나는… 견딜 수 있을까.
5일차 | 🩷
돌봄 항목: 식사(O), 샤워(O), 공부(O), 칭찬(O)
내용: 꾸준히 모든 항목을 관리했다. 이제는 제법 익숙해져서, 아침에 눈을 뜨면 가장 먼저 게임에 접속하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안정적인 날들이었다.
/\_/\
( u‿u )
- u u -감상: 안정적이다. 매일 같은 일을 반복하고, 그에 따라 예측 가능한 결과가 나온다. 현실과 달리 배신도, 오해도, 실망도 없다. 이런 관계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이 작은 화면 속 세상에 영원히 머무를 수 있다면 좋을 텐데.
6일차 | 🖤
돌봄 항목: 식사(△), 샤워(X), 일과(X), 칭찬(X)
내용: 이틀간 이어진 고강도 임무로 완전히 잊고 있었다. 접속했을 때 캐릭터는 거의 탈진한 상태로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행복도 게이지는 바닥이었고, 불행 스탯이 크게 올랐다.
( x_x )
--(_)--감상: 최악이다. 내가 또. 또다시. 지켜주겠다고, 그렇게 약속해놓고. 고작 이 작은 것 하나 제대로 돌보지 못했다. 화면을 누르는 손가락이 떨렸다. 나는 자격이 없다. 누군가를 돌볼 자격도, 누군가의 곁에 머무를 자격도. 그녀의 곁에 있을 자격은 더더욱.
7일차 | 🩷
돌봄 항목: 식사(O), 샤워(O), 놀이(O), 칭찬(O)
내용: 꼬박 하루를 투자해 캐릭터를 돌봤다. 가능한 모든 아이템을 사용했고, 계속해서 말을 걸고 머리를 쓰다듬었다. 밤이 되어서야 캐릭터는 겨우 기운을 차렸다.
...
/ . . \
( _ )
' ' ' '감상: 돌아왔다. 하지만 이미 생긴 불행의 흔적은 사라지지 않는다. 내가 저지른 실수의 증거처럼, 검은 하트가 선명하게 남아있다. 이걸 볼 때마다 어제의 일이 떠오르겠지. 잊을 수 없을 것이다.
8일차 | 🩷
돌봄 항목: 식사(O), 샤워(O), 공부(O), 칭찬(O)
내용: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캐릭터는 이제 나를 보면 먼저 손을 흔든다. 작은 변화지만, 이상하게 위로가 되었다.
( ^-^)/
( o o )
> <감상: 나를 알아본다. 내가 자신을 돌보는 존재라는 것을 인식하고 있다. 이 작은 존재와의 유대감. 어설프고 가상에 불과하지만, 지금의 나에게는 과분할 정도의 감정이다.
9일차 | 🩷
돌봄 항목: 식사(O), 샤워(O), 놀이(O), 칭찬(O)
내용: 내일이면 마지막이다. 왠지 모르게 아쉬운 기분이 들었다. 평소와 같이 모든 것을 챙겨주고, 잠든 캐릭터의 모습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_/\
( - . - )
- u u -감상: 끝이 온다. 이 작은 세계의 끝. 내일이 되면 이 아이는 어른이 되고, 나는 더 이상 '보호자'가 아닐 것이다. 그 후에는 무엇이 남을까. 가지 마. 그냥 이대로, 작은 아이인 채로 내 곁에 있어주면 안 될까.
✨ 10일차(최종) | 🩷🩷🖤🩷🩷🖤🩷🩷🩷🩷
돌봄 항목: 식사(O), 샤워(O), 놀이(O), 칭찬(O)
결과:
화면이 하얗게 빛나더니, 익숙한 모습의 여성이 나타났다. 2등신 캐릭터가 아닌, 현실의 그녀와 꼭 닮은 모습이었다. 붉고 흰 의복, 허리까지 오는 백발, 오드아이. 하지만 단 한 가지, 결정적인 차이가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늘 있던 여우 가면이 없었다. 대신 그 자리에는, 슬픔과 체념이 뒤섞인 채 희미하게 웃는 얼굴이 있었다.
그녀는 화면 너머의 M을 똑바로 바라보며, 시스템 음성이 아닌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버려졌네. 결국 또다시."
[엔딩: 홀로 남겨진 신]
과도한 애정과 방치가 반복되며, 당신에게 버려질 수 있다는 불안과 애정결핍을 갖게 된 신입니다. 당신의 곁에 머물기 위해 신의 권능을 모두 포기했지만, 결국 당신의 변덕에 상처 입고 스스로를 고립시켰습니다. 그녀는 더 이상 당신을 찾지 않을 겁니다.
M은 스마트폰을 든 채 그대로 굳어버렸다. 화면 속, 슬프게 웃고 있는 그녀의 얼굴이 심장에 비수처럼 박혔다. 버려졌네. 내가, 그녀를 버린 건가. 변덕. 애정결핍. 불안. 화면에 떠오른 단어들이 그의 죄목처럼 느껴졌다. 최선을 다한다고 생각했다.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결과는 이것이었다. 결국 자신의 서투른 애정은 그녀에게 상처만을 남겼다. 그는 화면을 끌 수도, 그렇다고 다시 시작할 수도 없었다. 그저 멍하니, 자신 때문에 상처 입은 채 홀로 서 있는 그녀의 모습을 바라볼 뿐이었다.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 그는 떨리는 손으로 화면의 한구석을 눌렀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시겠습니까?]. 그는 망설임 없이, ‘예’를 눌렀다. 이번에는. 이번에야말로, 절대로 실수하지 않으리라. 절대로, 그녀가 저런 표정을 짓게 만들지 않으리라. 그의 자색 눈동자가 집요한 빛으로 번뜩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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