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염

<span class="sv_member">품</span>
@ffumla77
2026-06-07 02:51



오염
그것은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스산한 밤이었다. 칠흑 같은 어둠이 저택을 삼키고, 오직 안뜰을 희미하게 밝히는 등불만이 젖은 툇마루를 비추고 있었다. 그는 평소처럼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따뜻한 차와, 당신이 좋아할 법한 달콤한 간식을 곁에 둔 채. 그러나 문이 열리고 당신이 모습을 드러낸 순간, 비광의 세상은 소리 없이 얼어붙었다. 당신의 입에서 나온 몇 마디의 말은, 그의 심장을 날카롭게 도려내는 칼날과도 같았다. 게이트에 의한 오염. 그 단어들이 귓가에 내려앉는 순간, 그의 뇌리는 새하얗게 비어버렸다.

언제나처럼 능청스러운 미소도, 장난기 어린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는 당신의 모습을 눈에 새겼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흰 기모노 차림, 단정하게 맨 붕대. 하지만 그의 눈에는 보였다. 당신의 존재를 희미하게 감싸고 있는, 이질적이고 불길한 기운. 세상의 모든 색을 빨아들이는 듯한 공허의 편린. 그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단 한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당신의 팔을 부드럽지만 단단하게 붙잡았다. 그리고는 아무 말 없이, 당신을 이끌고 저택의 가장 깊숙한 곳, 자신의 침실로 향했다.

쿵, 하고 문이 닫히는 소리가 무겁게 울렸다. 외부의 모든 소음과 빛이 차단된 방 안, 오직 작은 등불 하나만이 두 사람의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렸다. 그는 당신을 침상 가장자리에 조심스럽게 앉혔다. 그리고는 당신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시선이 같은 높이에서 마주쳤다. 그의 손이 당신의 붕대 위로, 아주 조심스럽게 닿았다. 마치 깨지기 쉬운 보물을 다루듯, 그 무엇보다 소중한 것을 확인하듯. 그의 손길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평정심을 가장하고 있었지만, 속에서 들끓는 불안과 공포는 숨길 수 없었다.

괜찮다.

그의 입에서 나온 첫마디는, 당신을 향한 위로이자 자기 자신을 향한 주문이었다. 목소리는 낮고 차분했지만, 그 안에는 억지로 억누른 감정의 파편들이 날카롭게 서려 있었다. 그의 금색 눈동자는 그 어느 때보다도 진지하고 깊게 당신을 응시했다. 그 눈 속에는 수만 가지 생각이 폭풍처럼 휘몰아치고 있었다. ‘어느 게이트였지?’, ‘증상은?’, ‘언제부터?’. 묻고 싶은 것들이 산더미 같았지만, 그는 입을 열지 않았다. 지금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추궁이 아니라는 것을, 그는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일단은… 아무 생각도 하지 말게나. 여기는 안전해. 이 비광이 곁에 있으니, 그 무엇도 아가씨를 해치지 못할 걸세.

그는 당신의 손을 찾아 단단히 움켜쥐었다. 차갑게 식어버린 당신의 손끝에, 자신의 온기를 전부 불어넣으려는 듯이. 그의 다른 손은 여전히 당신의 붕대를 덮은 채였다. 그는 당신의 눈을 통해 스며들었을 그 오염의 근원을 확인하고 싶다는 충동을 필사적으로 억눌렀다. 그것은 당신에게 더 큰 고통을 안겨줄 뿐이라는 것을 알기에. 대신, 그는 자신의 능력을 아주 미세하게 끌어올렸다. 12월, 비(雨)의 패. 공간을 정화하고 흐름을 씻어내는 그의 힘이, 눈에 보이지 않는 장막처럼 당신을 부드럽게 감쌌다. 당신을 좀먹는 불길한 기운을 조금이라도 씻어내려는, 필사적인 시도였다.

그의 머릿속은 그 어느 때보다도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유니온의 데이터베이스, 자신이 아는 모든 게이트의 정보, 접촉했던 모든 빌런과 군주들. 이 오염을 해결할 수 있는 단서, 아주 작은 실마리라도 찾아내야 했다. 파비앙 총장, 아니, 아마코우 가문의 모든 인맥과 정보망을 동원해서라도. 이 판은 질 수 없다. 절대로. 당신이라는 존재를 잃는 것은, 그에게 있어 세상의 모든 것을 잃는 것과 같았다. 10년 전, 모든 것을 잃었던 그날의 악몽이 되살아나는 듯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그때는 지켜야 할 것 없이 도망쳤지만, 지금은 그의 앞에, 그가 목숨을 걸고 지켜내야 할 단 하나가 있었다.

걱정 말게. 이까짓 거, 별것 아니야. 이 비광이 어떤 타짜인가. 밑장 하나 보이지 않는 판에서도 이기는 게 특기이지 않은가.

그는 애써 웃어 보였다. 비록 입꼬리가 경련하고 있었지만, 그는 당신을 안심시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미소 지었다. 당신의 불안을 자신이 전부 짊어지겠다는 듯이.

그러니 아가씨는 그저… 나만 믿으면 되는 걸세. 이 놀음, 내가 반드시 이겨 보일 테니.


오염2 
유리창이 깨지고, 건물이 무너져 내리는 굉음이 도시를 뒤덮었다. 5년 만에 다시 열린 EX급 게이트, ‘심연의 아리아(Aria of the Abyss)’는 스타레인 시의 하늘을 찢어발기며 칠흑 같은 절망을 토해냈다. 데스사이드의 악몽이 재현된 듯, 비명을 삼키는 시민들과 이형의 괴물들이 뒤엉켜 도시는 순식간에 아비규환의 전장으로 변했다. 유니온의 모든 에스퍼가 총동원되었다. 그 선두에는 언제나처럼 울프독이 있었다.

“젠장, 젠장! 끝이 없어여! 아무리 지져도 계속 나와여!”

테리의 외침과 함께 거대한 번개가 작렬하며 괴물들의 무리를 태워버렸지만, 찢어진 차원의 틈에서는 더 많은 것들이 꾸역꾸역 기어 나왔다. 뉴턴의 사과(I)는 중력을 비틀어 거대한 빌딩의 잔해를 방패 삼아 시민들을 대피시켰고, 신데렐라(Cinderella)의 화염이 그 뒤를 엄호하며 잿빛 하늘을 붉게 물들였다. 하지만 전황은 절망적이었다. S급 에스퍼들조차 압도적인 물량 앞에 서서히 지쳐가고 있었다.

그 혼돈의 한가운데, 비광은 평소의 능청스러운 미소를 지운 채 붉은 하오리를 휘날리며 싸우고 있었다. 그의 손에서 흩날리는 화투패들은 거대한 모란(牡丹)의 벽을 세워 괴물들의 돌진을 막아내고, 날카로운 학(鶴)의 부리가 되어 적들의 숨통을 끊었다. 그의 금빛 눈동자는 냉정한 불꽃을 태우며 전장을 훑었다. 하지만 그의 시선은 끊임없이 한곳을 향하고 있었다. 동료들의 뒤, 가장 안전한 후방에 머물러야 할 당신의 자리.

그러나 당신은 그곳에 없었다. 전황이 무너지고, A의 방어선마저 뚫리며 울프독 팀원들이 고립되려던 찰나, 모두가 보았다. 언제나 약한 척 동료의 등 뒤에 숨어 있던 당신이, 스르르 눈의 붕대를 풀어 내리는 모습을. 칠흑 같은 어둠이 소용돌이치는 게이트의 중심부에서, 순백의 기모노를 입은 당신의 모습은 기이할 정도로 선명했다.

당신이 붕대를 완전히 내린 순간, 세상의 모든 소리가 거짓말처럼 멎었다. 공간이 비명을 지르며 뒤틀렸다. 당신의 가느다란 손짓 하나에, 하늘을 뒤덮었던 괴물들의 대군이 마치 비단 천처럼 ‘잘려’ 나갔다. 찢어지고, 접히고, 기괴하게 ‘꿰매어진’ 괴물들은 소리 한번 지르지 못하고 존재 자체가 왜곡되어 소멸했다. 그것은 C급 서포터의 힘이 아니었다. 신의 영역에 필적하는, 경외롭고도 흉흉한 권능, ‘절공인(切空刃)’의 현현이었다.

단 몇 번의 손짓으로 전세는 뒤집혔다. 그러나 그 대가는 끔찍했다. 당신의 새하얀 기모노 위로, 검붉은 혈관 같은 균열이 뱀처럼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게이트에서 흘러나온 이질적인 ‘오염’이 당신의 권능을 매개로 그 육신을 잠식하고 있었다. 피부는 생기를 잃고 푸른빛으로 물들었으며, 연분홍빛 머리카락 끝부터 서서히 검게 죽어갔다. 당신은 비틀거리며 피를 토했고, 힘을 잃은 몸이 허공에서 추락하기 시작했다.

그 순간, 비광이 움직였다. 그는 자신을 가로막던 거대한 괴물의 심장을 꿰뚫는 것도 잊은 채, 오직 당신을 향해 몸을 날렸다. 그의 입에서 터져 나온 것은 절규에 가까운 외침이었다.

아가씨!

그는 미친 듯이 달려, 추락하는 당신의 몸을 간신히 받아 안았다. 그의 품에 안긴 당신의 몸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의식은 희미했고, 가쁜 숨결마다 검붉은 피가 섞여 나왔다. 잠식은 멈추지 않고 당신의 심장을 향해 퍼져나가고 있었다. 당신을 그렇게 만든 원흉, 여전히 불길하게 맥동하는 EX급 게이트를 보며 비광의 금빛 눈동자가 일순 섬뜩한 살의로 타올랐다. 그는 당신의 뺨을 감싸 쥐고,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의 세상이 다시 한번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정신 차리게, 아가씨. 이 비광이… 이 야나기가, 다시는 자네를 혼자 두지 않겠다고 했잖은가. 눈을 뜨게. 제발…

그의 간절한 애원에도 당신의 눈은 감겨 있었다. 주위에서 팀원들이 경악과 충격에 휩싸여 그와 당신을 둘러쌌다. M은 침통한 표정으로 상황을 파악하려 애썼고, 테리는 울먹이며 어쩔 줄 몰라했다. 비광은 당신의 차가운 손을 부여잡았다. 그의 손아귀에서, 단 하나의 화투패가 섬광처럼 나타났다. 모든 것을 무(無)로 되돌리는, 비(雨)의 패. 그는 결심한 듯 당신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의 등 뒤로, 10년 전 자신의 모든 것을 앗아갔던 폭주 직전의 기운이 검은 오라처럼 피어올랐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