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 ooc
서른일곱 번째 아침이었다.
비광은 눈을 떴다. 천장의 균열 패턴을 외우고 있었다. 왼쪽에서 세 번째 갈라진 선이 오른쪽으로 꺾이는 지점, 그 위에 얹힌 먼지의 양까지. 몸을 일으키기 전에 손바닥을 펼쳤다. 아직 온기가 남아 있었다. 그녀의 손가락이 빠져나간 자리, 그 공백의 온도를 매번 확인하는 것이 이 하루의 시작이 되어버렸다.
시계는 오전 여덟 시 사십이 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밀키웨이 로드의 가로수가 아침 햇살에 금빛으로 물드는 시각. 저 건너 화과자 가게의 차양이 펼쳐지는 시각. 그리고.
렌이 죽는 시각까지, 열네 시간 삼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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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이 아침으로 돌아왔을 때, 비광은 미쳤다고 생각했다. 제 정신이 아닌 것은 세상 쪽이라 믿었다. 그녀를 살려냈다. 팔에 안았다. 숨이 돌아오는 것을 확인하고, 그 밤을 함께 새웠다. 손깍지를 풀지 않았다. 놓으면 안 된다는 직감이 갈비뼈를 쥐어짰으니까.
그리고 다음 날, 그녀는 죽었다.
같은 장소가 아니었다. 같은 방식도 아니었다. 첫 번째는 교차로였고, 두 번째는 계단이었고, 세 번째는 그저 숨이 멈추는 것이었다. 옆에 있었는데. 손을 잡고 있었는데. 그런데도 죽었다.
비광은 알았다. 아홉 번째쯤에.
곁에 있을수록 빨리 온다. 손을 잡으면 시간이 앞당겨지고, 이름을 부르면 더 좁혀지고,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무언가가 끈을 당기듯 그녀의 시간을 잘라냈다. 인과율이라는 실타래가 뒤틀려, 존재해서는 안 되는 매듭이 생긴 것이다. 그 매듭의 이름이 자신이었다.
아마코우 야나기라는 이름. 비광이라는 그림자. 그것이 렌의 세계에서 완전히 지워져야만, 그녀의 시간이 앞으로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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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일곱 번째 아침, 비광은 이불 위에 앉아 소매에서 패를 꺼냈다.
국화.
아홉 번째 숨바꼭질의 마지막 패. 언제부턴가 이것만은 사라지지 않고 아침마다 소매 안에 남아 있었다. 회귀가 모든 것을 되감아도, 이 패 한 장만은 전날의 것이 아닌 오늘의 것이었다. 비광은 그 꽃잎을 엄지로 쓸었다. 서른일곱 번을 쓸어서 모서리가 닳아 있었다.
선택지는 두 개였다.
하나. 이대로 반복한다. 매일 아침 눈을 뜨고, 그녀를 만나고, 손을 잡고, 웃음을 듣고, 밤에 그녀가 사라지는 것을 본다. 정체된 하루의 무한 반복. 그러나 그 안에서 그녀는 웃는다. 숨바꼭질을 끝낸 뒤의, 처음으로 진짜인 그 웃음을 매일 볼 수 있다.
둘. 놓는다. 이 아침에서 돌아서서, 그녀의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진다. 밀키웨이 로드를 걷지 않고, 화과자 가게에 들르지 않고, 시계탑을 올라가지 않는다. 레인웨이의 지우산을 수거하지 않는다. 그녀가 야나기라는 이름을 기억하지 못할 만큼 멀리 물러난다. 그러면 그녀는 산다. 내일이 온다. 모레가 온다. 계절이 바뀌고, 눈이 내리고, 봄이 와도 그녀는 숨을 쉰다.
다만 그 숨에 자신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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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광은 패를 내려놓지 못했다. 서른일곱 번째 아침에도, 서른여덟 번째에도. 마흔세 번째 아침, 그는 무릎 위에 국화 패를 올려놓고 처음으로 소리 내어 웃었다. 아무도 없는 방에서. 울음도 아니고 한탄도 아닌, 진짜로 우스워서 나오는 웃음이었다.
내기꾼이 패를 못 놓다니.
낙장불입이라 했다. 엎은 패는 주워 담을 수 없다고, 제 입으로 말했다. 그런데 지금 이 비광은 이미 엎어진 패를 주워 담으려 서른일곱 번을 뒤집고 있지 않은가. 운명의 장난이라 했지. 한 끗 차이로 희비가 엇갈리는 것이 인생의 묘미라고. 그런데 이건 한 끗이 아니었다. 판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었다.
쉰두 번째 아침.
비광은 처음으로 그녀를 만나러 가지 않았다.
대신 시계탑 꼭대기에 올라가 지우산을 뽑았다. 1년 전 자신이 꽂아두고 떠났던 그 자리. 그녀가 기다리던 자리에 지우산 대신 국화 패를 놓았다. 그리고 계단을 내려왔다. 매 발자국이 자기 살점을 밟는 것 같았다.
밀키웨이 로드를 지나갔다. 화과자 가게 앞에서 발이 멈추었다. 노란 차양 아래로, 흰 기모노를 입은 여자가 진열대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붕대 감긴 눈 위로 분홍빛 머리카락이 흘러내리고, 소매가 바람에 일렁이고, 가게 주인에게 팥모찌를 달라 말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살아 있었다.
비광은 걸음을 옮기지 못했다. 주머니 안에서 제 손이 부르르 떨리는 것을 느꼈다. 가고 싶었다. 옆에 서서, 이 비광이 산다, 한마디만 하고 싶었다. 팥모찌 백 개라도 사주겠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의 발이 반 보라도 가까이 가면, 그녀의 시간이 찢어진다. 야나기라는 이름이 그녀의 입술 위에 오르는 순간, 밤은 다시 그녀를 데려가 버린다. 비광은 알았다. 이미 쉰한 번을 확인했으니까.
비광은 걸었다. 밀키웨이 로드를 등지고, 레인웨이 방면도 아닌, 어디로도 향하지 않는 방향으로. 지우산이 없는 손이 허전했다. 수십 년을 들고 다닌 물건이 사라진 것보다, 그 무게를 대신 채우던 다른 손가락이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쉰세 번째 아침이 오지 않았다.
대신 다음 날이 왔다. 10월 1일이. 비광은 눈을 떴을 때 천장의 균열이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왼쪽에서 세 번째 선이 없었다. 시계는 아홉 시 십일 분을 가리키고 있었고, 몸이 무거웠고, 소매 안에 국화 패는 없었다.
시간이 흘렀다.
흘렀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데 반나절이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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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의 날들을 뭐라 불러야 할까. 비광은 생각했다. 라쿠고에도 이런 이야기는 없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어서 되돌렸는데, 되돌릴수록 죽고, 놓아야 사는데, 놓으면 다시는 잡을 수 없는. 그런 이야기. 오치라 하면 너무 가볍고, 닌조바나시라 하면 너무 축축하다. 이건 그냥.
끝난 이야기였다.
비광은 울프독에 출근했다. 임무를 수행했다. 테리가 괜찮으냐고 물었을 때 웃었다. 괜찮다고 했다. 그 웃음이 예전과 같은지 다른지는 스스로 판단할 수 없었으나, 적어도 테리는 더 묻지 않았다. I는 한 번 긴 시선을 보냈고, M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신데렐라만이 비광의 지우산이 사라진 것을 알아챘으나, 역시 입을 열진 않았다.
석 달이 지났다.
비광은 밀키웨이 로드를 걷지 않았다. 화과자 가게 앞을 지나지 않았다. 시계탑은 가지 않았다. 레인웨이 외곽도. 시바하마 극장도. 그녀의 국화 향이 스며든 장소란 장소는 전부, 지도에서 검게 칠한 것처럼 우회했다.
그런데도 가끔, 소매를 뒤적이는 손이 있었다. 없는 패를 찾는 손이. 없는 온기를 확인하는 손가락 끝이.
ほんまに、あほやな。
그가 어느 밤, 유니온 본부 옥상에서 혼잣말을 뱉었다. 웃고 있었다. 울지는 않았다. 울 수 있었다면 차라리 나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 비광이라는 사내는, 아홉 번을 쫓고 쉰두 번을 반복한 끝에 스스로 패를 접은 놈이었다. 접은 패 앞에서 우는 것은 도박꾼의 체면이 아니었다.
다만, 한 가지.
그는 알고 있었다. 저 어딘가에서 그녀가 숨을 쉬고 있다는 것을. 팥모찌를 사 먹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내일이 오고, 모레가 오고, 계절이 바뀌어도 그녀의 가슴이 오르내린다는 것을.
그것으로 됐다.
승부사가 건 마지막 판의 결과가 그것이었다. 이기지도 지지도 않은, 스스로 내려놓은 패. 낙장불입이라 했으니, 이 선택도 무를 수 없었다.
이 야나기, 끝까지 자네 편이었네.
아무도 듣지 못하는 말이, 겨울 하늘의 별 사이로 스며들었다.
날짜: 1월 2일 요일: 목요일 계절: 겨울 시각: 새벽 2시 14분 장소: 유니온 본부 옥상 PC와 비광의 관계: 영원히 끊어진 인연. 비광이 스스로 선택한 이별. PC를 향한 비광의 감정: 놓아야만 살릴 수 있었던 사람을 향한, 단 한 번도 식지 않은 사랑. 그것을 증명하는 방식이 부재(不在)가 되어버린 아이러니에 대한 담담한 수긍. 비광을 향한 PC의 감정: (알 수 없음. 그녀는 그를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다.) PC의 복장: (불명) 비광의 복장: 검은 장옷 위 붉은 하오리. 지우산 없음. PC의 자세·상세위치·상태: 밀키웨이 로드 어딘가에서 살아 숨 쉬고 있음. 비광의 자세·상세위치·상태: 옥상 난간에 기대어 서서 겨울 밤하늘을 올려다보는 중. 예정된 일정: 없음. 주변npc 속마음: (테리) …비광 선배, 요즘 모찌를 안 먹는다. 그게 제일 이상하다.
[OOC: 이어서. 이후 NPC와 멀어진 PC. 일상을 살아가면서도 줄곧 어떤 위화감을 느낀다. 시간이 흘러 사랑하기에 멀어지려 한 NPC의 진심을 PC가 어떤 이유로든 스스로 깨달아버린 순간, PC는 알 수 없는 힘으로 모든 것을 알아차리게 된다. 그와 동시에 NPC가 이별한 그 순간으로 회귀한 PC. PC는 그대로 NPC를 붙잡으며 이별을 거부하고, 미지의 힘으로 세계가 개편되며 인과율의 굴레가 깨진다. PC가 회귀한 것을 모르는 NPC가 이별한 시점부터 서술하며, PC의 태도로부터 묘한 위화감을 느끼고, PC의 말을 들으며 PC의 회귀를 확신하는 모습을 단계적으로 내면 심리와 함께 3000자 이상 서술한다. 이후 일상의 궤도로 돌아온 PC와 NPC의 모습을 후일담으로 서술한다.]
비광은 시계탑 꼭대기에서 국화 패를 내려놓았다. 지우산을 뽑아 어깨에 걸치고, 그 무게가 손에 익는 것을 확인한 뒤, 계단을 향해 몸을 돌렸다.
첫 번째 발자국.
갈비뼈 안쪽이 쪼개지는 감각. 숨이 턱에 걸렸으나 내뱉었다. 두 번째 발자국. 세 번째. 시계탑의 나선형 계단이 아래로 뻗어 있었고, 매 층계를 밟을 때마다 등 뒤의 공기가 가벼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녀의 기척이 남아 있던 자리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괜찮다. 이렇게 하면 된다. 내려가서, 밀키웨이 로드를 지나치지 않고, 레인웨이를 거쳐 유니온으로 돌아가면 된다. 내일이 온다. 그녀에게 내일이 온다. 그것으로.
일곱 번째 발자국을 뗐을 때였다.
등 뒤에서 소리가 났다. 계단을 올라오는 발소리가 아니었다. 공기가 찢어지는 소리. 직물이 바람을 가르며 펄럭이는 소리. 그리고.
뭐야, 벌써 가시려구요?
비광의 발이 멈추었다.
아니, 멈춘 것이 아니었다. 소매를 무언가 붙잡고 있었다. 하얀 실. 아니, 천. 넓은 소매에서 흘러나온 비단이 그의 하오리 끝자락을 감아 쥐고 있었다. 그 감촉을 비광은 알고 있었다. 쉰두 번의 아침 동안 한 번도 잊은 적 없는.
돌아보지 못했다. 돌아보면 안 됐다. 시선이 마주치면 그녀의 시간이 찢어진다. 그것을 알고 있었다. 쉰한 번을 확인한 사실이었다.
그러니까 이 비광, 자네를……
……보면 안 되네.
목소리가 갈라졌다. 제 입에서 나온 소리가 이렇게 추한 적이 언제였던가. 비광은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하오리 끝을 잡은 실에 손을 뻗었다. 떼어내야 했다. 떼어내면 된다. 이 매듭 하나를 풀면 그녀는 산다.
그런데 손가락이 실에 닿는 순간, 그의 손목을 다른 손이 움켜쥐었다. 작고, 마르고, 차갑고, 그러면서도 단단한. 이 감각을 모를 리가 없었다.
안 돼요.
그녀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울렸다. 가까웠다. 너무 가까웠다. 이 거리에선 안 된다. 비광은 이를 악물었다. 심장이 찢어지는 것과 세계가 찢어지는 것 사이에서 전자를 골랐던 놈이, 지금 이 손목을 뿌리칠 수 있을 리가.
그런데.
이상했다.
가까이 있는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공기가 무거워지지 않았다. 그녀의 숨소리가 끊기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손에서 전해지는 맥박이 또렷하고, 힘차고, 살아 있었다.
야나기 님, 고개 돌리세요.
그녀의 목소리에 떨림이 없었다. 평소의 그 경박하고 능청맞은 톤. 그런데 그 밑에 깔린 것이 달랐다. 쉰두 번의 아침에서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뭔가를 확신하는 사람의 음색.
비광은 돌아보았다.
흰 기모노. 바람에 일렁이는 넓은 소매. 붕대 감긴 눈. 분홍빛 머리카락 사이로 흘러내리는 가을 햇살. 그녀가 서 있었다. 시계탑 꼭대기에, 그가 방금 국화 패를 내려놓은 바로 그 자리에.
그런데.
렌의 볼 위로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웃으면서. 웃고 있었다.
쉰두 번이요, 야나기 님.
비광의 숨이 멈추었다.
그 횟수를 제가 어떻게 알겠어요. 제가 직접 세지 않았으면.
세계의 공기가 바뀌었다. 무언가 거대한 것이 풀려나가는 감각. 갈비뼈를 옥죄던 보이지 않는 실이 하나하나 끊어지는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비광은 그녀의 손목 위, 자신의 맥박과 그녀의 맥박이 나란히 뛰는 것을 느꼈다.
죽지 않았다.
가까이 있는데. 이름을 불렀는데. 시선이 마주쳤는데.
죽지 않았다.
오라비가 엎은 패, 제가 뒤집었습니다.
렌이 그의 손목을 잡은 채 한 발 다가왔다. 국화 패를 발끝으로 가리키며.
낙장불입이라면서요? 이 패는 제 것이기도 한데, 상의도 없이 내려놓으시면 어떡해요.
비광의 시야가 흐려졌다. 아, 하고 새어나온 숨이 웃음인지 다른 무엇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금빛 눈동자 위로 무언가 뜨거운 것이 차올랐으나, 그것이 무엇인지 인정하기 전에 그녀가 말했다.
다신 혼자 판 접지 마세요. 제가 죽든 살든 저한테 물어봤어야죠.
그 말이 비광의 가슴에 떨어지는 순간, 무언가가 완전히 깨졌다. 인과율의 사슬인지, 이 사내의 마지막 허세인지.
비광은 무릎이 꺾이듯 한 발 앞으로 나갔다. 그녀의 이마에 제 이마를 맞대었다. 손이 떨리고 있었다. 쉰두 번의 아침 동안 단 한 번도 떨리지 않았던 손이.
……마, 한 대 때려도 되겠나.
목소리가 젖어 있었다.
이 비광이 쉰두 번을 벌벌 떨며 자네를 놓아야 했는데, 지금 와서 뒤집는 건 반칙 아닌가.
렌의 손이 그의 뺨에 닿았다. 차가운 손바닥이 젖은 피부 위를 쓸었다.
반칙이요? 저는 이겼을 뿐인데.
비광은 웃었다. 울면서 웃었다. 쉰두 번 동안 한 번도 울지 못한 놈이,
이어서 출력
그 웃음이 처음에는 소리가 되지 못했다. 목구멍에서 빠져나온 것은 숨이었고, 그 숨이 경련처럼 어깨를 흔들었고, 어깨가 흔들리자 이마를 맞댄 그녀의 이마에도 그 진동이 전해졌다. 비광은 자신의 볼 위를 쓸어내리는 차가운 손바닥에 고개를 기울였다. 무의식이었다. 쉰두 번 동안 스스로에게 금지했던 동작이 풀린 태엽처럼 흘러나왔다.
반칙이라, 이 사람아.
간신히 뱉은 말의 끝이 부산 사투리로 풀어졌다. 가장 원초적인 말이 가장 먼저 흘러나오는 법이었다. 금빛 눈동자 위로 맺힌 물기가 속눈썹을 타고 떨어졌고, 그것이 그녀의 손등 위에 닿는 온도를 비광은 느꼈다.
인과율이 깨지는 감각은 의외로 고요했다. 시계탑의 태엽이 멈추는 소리도, 세계가 갈라지는 굉음도 없었다. 다만 등줄기를 따라 내려오던 보이지 않는 무게가 사라졌다. 쉰두 번의 아침마다 목을 옥죄던 나선형 계단의 중력이,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비광은 떨리는 손으로 그녀의 손목을 감쌌다. 맥박을 세었다. 하나. 둘. 셋. 끊기지 않았다. 넷. 다섯. 약해지지 않았다. 여섯. 일곱. 여덟.
……살아있구먼.
그 세 글자를 내뱉는 데 걸린 시간 동안, 비광의 세계 전부가 재편되었다. 죽음을 전제로 지탱하던 결심이, 그녀의 심장 소리 앞에서 허물어졌다.
자네, 이 비광한테 물어봤어야 한다고 했제? 그래, 맞다. 맞긴 한데.
이마를 맞댄 채 코끝이 스쳤다. 비광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젖은 채로, 추한 채로, 그래도 웃었다. 이 사내는 결국 웃는 수밖에 없는 인간이었으니까.
근데 말이지. 물어보면 자네가 뭐라 했겠나. 죽어도 괜찮으니 옆에 있겠다, 그랬을 거 아닌가.
렌의 입꼬리가 올라가는 기척을 느꼈다. 대답하지 않아도 알았다. 알았기 때문에 묻지 않은 거였다. 물으면 그 대답을 거절할 자신이 없었으니까.
비광은 숨을 들이마셨다. 가을 공기 속에 국화 향이 짙었다. 그녀의 향이었다. 쉰두 번 동안 가장 그리웠고, 가장 피했던 냄새.
하, 졌다.
이마를 떼고 한 발 물러섰다.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제대로. 도망치지 않고. 붕대 감긴 눈 위로 흐르는 눈물과, 그 아래 걸린 미소를. 금빛 눈동자가 그 풍경을 삼키듯 응시했다.
이 야나기, 자네한테 졌네. 완패일세.
비광은 그녀의 손등을 들어올렸다. 쉰두 번째 아침에 하지 못한, 하지 않기로 했던 것을 했다. 입술을 갖다 대었다. 천천히. 떨리는 채로.
그리고 놓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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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 개월 뒤, 밀키웨이 로드의 화과자 가게 앞.
비광의 손에는 지우산이 들려 있었고, 그 반대편 손에는 언제나처럼 다른 손이 걸려 있었다. 팥모찌 두 상자. 꽃구경 가는 길. 별일 아닌 오후.
자, 이번엔 내기 걸어도 되겠나?
능청맞은 물음에 옆에서 돌아오는 경박한 대꾸를 기다리며, 비광은 씨익 웃었다.
날짜: 1월 4일 요일: 토요일 계절: 겨울 시각: 오후 2시 30분 장소: 밀키웨이 로드 화과자 가게 앞 PC와 비광의 관계: 인과율을 깨뜨리고 되찾은 연인. 영원히 곁에 머무르기로 한 두 사람. PC를 향한 비광의 감정: 쉰두 번의 이별 끝에 돌아온 기적에 대한 경이와, 다시는 놓지 않겠다는 맹세 위에 쌓아올린 일상적이고도 절대적인 사랑. 비광을 향한 PC의 감정: 그가 홀로 짊어진 무게를 알기에 더욱 깊어진 애정. 이 손을 놓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 PC의 복장: 흰 실크 기모노, 넓은 소매, 겨울용 숄 걸침 비광의 복장: 검은 장옷 위 붉은 하오리, 지우산 복귀 PC의 자세·상세위치·상태: 비광의 왼손에 손깍지를 끼고 나란히 걷는 중. 건강함. 비광의 자세·상세위치·상태: 오른손에 지우산, 왼손에 蓮의 손을 쥐고 화과자 가게 앞에 서 있음. 평온함. 예정된 일정: 꽃구경 (밀키웨이 로드 남쪽 공원) 주변npc 속마음: (테리) 비광 선배가 모찌를 다시 사기 시작했다!! 최고!! 렌 씨 덕분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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