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화 버튼

<span class="sv_member">품</span>
@ffumla77
2026-06-12 18:33
화창했던 오후가 한순간에 뒤집힌 건, 밀키웨이 로드 어귀에서였다. 허공에 잔존하던 데스사이드의 사념인지, 아니면 어느 자투리 게이트가 토해낸 변덕인지. 옅은 보랏빛 안개가 비광의 발치를 휘감았다가 흩어졌고, 그가 어, 하는 소리를 채 끝맺기도 전에 펑, 하고 가벼운 연기가 피어올랐다.

그 자리에 남은 것은 한 마리의 새하얀 학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학이라기엔 어딘가 어설픈, 은빛 깃털을 두른 자그마한 새였다. 골반까지 닿던 은발은 정수리의 깃털로 변했고, 찬란하던 금빛 눈동자만은 그대로 동그래져 蓮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푸드덕. 날개가 제 뜻대로 접히지 않는지, 작은 새는 자갈 위에서 한 바퀴 우스꽝스럽게 굴렀다.

삐익! 삐이익!

무어라 말을 하려는 듯 부리를 빠끔거렸으나, 입 밖으로 나오는 건 가냘픈 새 울음뿐이었다. 발치에는 둥근 붉은 선글라스만 덩그러니 떨어져 있었다. 작은 새는 그 선글라스를 부리로 콕콕 쪼아 보더니, 제 신세가 기가 막히다는 듯 고개를 푹 떨궜다.

그러나 蓮은 당황하기는커녕, 어디서 그새 사 왔는지 동그란 녹음벨 버저 몇 개를 자갈 위에 가지런히 늘어놓았다. '밥', '사랑해', '간식', '안아줘' 같은 단어가 적힌, 발만 한 크기의 버튼들이었다.

자, 야나기 님.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면 이 버튼을 눌러 보세요.

그 능청맞은 권유에, 작은 새가 된 비광은 동그란 눈을 데구루루 굴렸다. 이 사람이, 이 상황에서, 기껏 사 온 게 이거란 말인가. 어이가 없어 부리를 딱딱 부딪쳤으나, 결국 그 호기심을 못 이긴 모양이었다.

뒤뚱뒤뚱, 자그마한 발로 자갈을 밟고 다가간 비광이 가장 가까운 버튼 위에 폴짝 올라섰다.

사♡랑♡해

눌리지 말아야 할 곳이 눌렸는지, 분홍빛 단어가 자갈 마당 위로 또랑또랑 울려 퍼졌다. 비광은 화들짝 놀라 그 위에서 펄쩍 뛰어내렸다. 깃털이 부르르 곤두섰다. 아니, 이게 아니라! 하는 듯 황급히 옆 버튼으로 옮겨 갔으나.

안아…줘?

하필이면 또 그 버튼이었다. 작은 새가 된 비광은 부리를 한껏 벌린 채 얼어붙었다. 보랏빛 글자가 끝에 물음표를 매단 채, 어쩐지 더없이 애처롭게 마당을 굴렀다. 푸드덕, 푸드덕. 깃털이 죄다 곤두선 채 제자리에서 발을 동동 구르는 꼴이, 영락없이 부끄러움에 몸 둘 바를 모르는 모양새였다.

삐이익…!

제발 그 둘은 빼고 들으라는 듯, 작은 새가 蓮을 향해 필사적으로 울었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짧고 다급한 발걸음이 이번엔 '밥' 버튼을 향했으나, 그마저도 어찌나 황망했는지 발이 미끄러져 그만 '간식' 버튼을 밟고 말았다.

간↗식↘

노란 글자가 경쾌하게 튀어 올랐다. 작은 새는 그제야 모든 걸 포기한 듯, 자갈 위에 폭 주저앉아 깃털 속에 머리를 파묻었다. 사♡랑♡해, 안아줘, 간식. 결국 제 입으로 골라 누른 것이 그 세 마디뿐이라니. 평소 그 능청맞은 입담은 다 어디로 갔는지, 새가 된 비광에게 남은 건 솔직하다 못해 적나라한 본심뿐인 듯했다.

잠시 후, 비광은 체념한 듯 고개를 빼꼼 들었다. 동그란 금빛 눈이 蓮을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그러더니 뒤뚱뒤뚱 다시 한번, 이번엔 망설임 없이 '사랑해' 버튼 위로 폴짝 올라섰다.

사♡랑♡해

이번엔 실수가 아니라는 듯, 작은 새가 그 버튼을 몇 번이고 콩, 콩, 다시 밟았다. 사♡랑♡해. 사♡랑♡해. 분홍빛 고백이 가을 햇살 아래 연거푸 울려 퍼졌고, 비광은 그 위에서 깃털을 부풀린 채 蓮을 빤히 올려다볼 따름이었다. 새가 되어 말 한마디 못 하게 되어서야, 가장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더없이 분명해진 까닭이었다.

📌

Status
날짜: 10월 1일
요일: 수요일
계절: 가을
시각: 오후 1시 41분
장소: 밀키웨이 로드 어귀
PC와 비광의 관계: 평생을 함께하기로 맹세한 연인
PC를 향한 비광의 감정: 새가 되어 말문이 막히자 부끄러움에 허둥대다가, 결국 가장 솔직한 본심만을 골라 누르는 순정 어린 애정
비광을 향한 PC의 감정: (직접 서술 제외)
PC의 복장: 넓은 소매의 흰 실크 기모노, 두 눈을 가린 하얀 붕대
비광의 복장: (변신 상태) 은빛 깃털의 자그마한 새, 발치에 둥근 붉은 선글라스
PC의 자세·상세위치·상태: 자갈 위에 녹음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