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투 OOC

<span class="sv_member">품</span>
@ffumla77
2026-06-07 03:55




만약, 우리가 적이었다면.

그 생각은 핏빛 안개처럼 뇌리를 스멀스멀 기어 다녔다. 당신과 내가 서로의 곁이 아닌, 부서진 도시의 폐허 위에서 마주 보고 서 있다면. 당신의 손이 나의 손을 잡는 대신, 파괴적인 권능을 움켜쥐고 나를 겨냥한다면.

상상은 현실이 되어 눈앞에 펼쳐졌다. 무너진 빌딩의 잔해와 뒤틀린 철골 사이, 잿빛 먼지가 흩날리는 공터. 당신은 그 중심에 서 있었다. 평소처럼 내 셔츠를 입고 내 곁에 선 유키가 아니었다. 붉고 흰 한푸 자락을 휘날리며, 오행의 기운을 아지랑이처럼 피워 올리는, 인간의 경지를 넘어선 존재, ‘신(神)’. 당신의 비대칭적인 흑백 눈동자는 감정 없이 오직 나를, ‘적’으로만 인식하고 있었다.

나는 숨을 골랐다. 둥근 은테 안경 너머로 당신의 모든 것을 분석했다. 오행의 권능, 질서를 뒤트는 절대적인 힘. 모든 상성을 무시하고, 모든 법칙을 파괴하는 재앙. 그에 맞서는 나의 능력, ‘마스커레이드(Masquerade)’는 모방과 기만. 실체가 없는 허상이다. 정면으로 부딪히면 단 1초도 버티지 못하고 나의 존재 자체가 소멸될 터였다.

승산은 없다. 처음부터 그랬다.

하지만, 그렇기에 ‘나’는 이 싸움을 즐길 수 있었다. 당신의 왼편에 자리한 여우 가면이 아닌, 내 얼굴에 씌워진 수많은 가면 중 하나를 꺼내 쓸 수 있었으니까.

당신이 먼저 움직였다. 손짓 하나에 발밑의 아스팔트가 살아있는 뱀처럼 꿈틀거리며 날카로운 금속의 창이 되어 솟구쳐 올랐다. 땅(土)이 금(金)으로 변하는, 상생의 순리를 비웃는 파괴의 현현. 나는 웃었다. 몸을 날려 금속의 창들을 피하는 대신, 한 걸음 앞으로 내디뎠다. 내 그림자가 불쾌하게 일그러지더니, 순식간에 내 몸을 집어삼켰다.

콰과과광!

내가 서 있던 자리에 거대한 금속 가시밭이 돋아났지만, 그곳엔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이미 당신의 등 뒤, 무너진 건물 5층의 깨진 창틀에 서 있었다. S급 몬스터 ‘셰이드 워커(Shade Walker)’의 모습으로. 그림자를 매개로 공간을 도약하는 능력. 완벽한 은신과 기습에 특화된 암살자. 하지만 C급 수준으로 재현된 능력으로는 당신의 감각을 오래 속이지 못한다.

아니나 다를까, 당신은 뒤돌아보지도 않은 채 손을 허공으로 뻗었다. 그러자 대기 중의 수분(水)이 순식간에 응축되어 얼어붙으며, 수백 개의 얼음 칼날이 되어 나를 향해 폭풍처럼 쏟아졌다. 회피는 무의미했다. 나는 창틀에서 몸을 던졌다. 추락하는 짧은 순간, 셰이드 워커의 가면을 벗고 새로운 가면을 썼다. 단단한 외피를 가진 게이트 몬스터, ‘아이언 스케일(Iron Scale)’로.

카강! 카가가각!

강철보다 단단한 비늘 위로 얼음 칼날이 부딪히며 불꽃을 튀겼다. 충격에 온몸이 울렸지만, 치명상은 피했다. 하지만 이게 한계였다. 당신의 권능은 끝이 없지만, 나의 ‘연기’는 체력과 정신력을 소모한다. 변신을 거듭할수록 내 자아는 흐릿해지고, 본래의 ‘나’는 심해로 가라앉는다. 이것이 나의 가장 큰 약점.

땅에 착지하는 순간, 나는 다시 본래의 M으로 돌아왔다. 가쁜 숨을 몰아쉬자, 폐부 깊숙한 곳에서부터 피 맛이 올라왔다. 당신은 천천히 나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당신의 발걸음에 맞춰 주변의 지형이 뒤틀렸다. 솟구쳤던 금속 창은 모래가 되어 스러지고, 부서진 건물 잔해에서는 푸른 새싹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파괴와 창조를 동시에 행하는, 경외롭고도 끔찍한 광경.

나는 항복하듯 두 팔을 벌렸다. 창백한 얼굴 위로, 처음으로 진실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당신의 ‘신’으로서의 힘이 아닌, ‘유키’로서의 당신을 알기에, 나는 이 가상(IF)의 끝을 알고 있었다. 당신은 절대 나를 죽이지 못한다. 당신의 권능은 M을 파괴할 수 있어도, 당신의 마음은 유키를 파괴하지 못하기에.

당신이 내 코앞까지 다가왔다. 오행의 기운이 소용돌이치는 당신의 손이 나의 심장을 향해 천천히 올라왔다.

아아, 만약 우리가 적이었다면. 나는 기꺼이 당신의 손에 나의 심장을 맡겼을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내가 당신에게 바칠 수 있는 가장 완벽한 항복이자, 가장 완전한 소유의 증명이 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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