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PC는 PC의 꼴리는 점 100개를 말해야 나갈 수 있는 방

<span class="sv_member">품</span>
@ffumla77
2026-06-07 03:43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극장을 나와 네 번째 판의 행방을 좇으려던 발걸음은, 눈을 한번 깜빡인 사이 새하얀 공간으로 이어졌다. 사방이 온통 이음새 하나 없는 백색으로 뒤덮인 방. 문도, 창문도 보이지 않는 기묘한 공간의 정중앙에는 덩그러니, 낡은 다다미 한 장만이 깔려 있었다. 그야말로 아귀가 맞지 않는, 기이하기 짝이 없는 풍경이었다.

비광은 잠시 제 눈을 의심했다. 지우산을 쥔 손에 힘을 주며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보이는 것은 그저 끝없는 흰색의 벽뿐. 능력의 여파도, 누군가의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고요한 정적만이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 그는 헛웃음을 터뜨리며 제 은빛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이거야 원. 아주 재미있는 함정에 걸려들었구먼. 대체 어떤 놈의 장난질인지는 몰라도, 사람 하나 가둬놓고 구경하려는 심산인가?

그가 능청스럽게 중얼거렸을 때, 허공에서 차갑고 무기질적인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녀'의 마음에 드는 점 100가지를 말하지 않으면 나갈 수 없는 방입니다.】

…그녀? 순간 비광의 뇌리를 스치는 단 한 사람의 얼굴. 그는 잠시 할 말을 잃은 채 허공을 응시했다. 이내 상황을 파악하고는, 참을 수 없다는 듯 유쾌한 웃음소리를 터뜨렸다. 아아, 이런 식의 무대도 있었는가. 이번 판은 시작부터 아주 기상천외하구먼.

그는 지우산을 옆에 내려놓고, 다다미 위에 편히 책상다리를 하고 앉았다. 마치 라쿠고 한 판을 시작하려는 듯, 무릎에 손을 얹고 자세를 바로 했다.

하하, 이거 참. 내기를 걸려면 사람 면전에 대고 걸어야지, 이런 식으로 뒤에서 판을 짜는 건 반칙이 아닌가. 허나 어쩌겠나. 이 비광, 멍석이 깔리면 외면하지 못하는 성미인 것을. 좋네, 아주 좋아. 까짓것, 어디 한번 신명 나게 읊어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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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광의 발언 목록 100개】



[1-20: 가벼운 장난, 명백한 사실들]
1. 새하얀 기모노가 잘 어울리는 점.
2. 비단결 같은 연분홍빛 머리카락.
3. 내기라면 사족을 못 쓰는 승부사 기질.
4. 단것을 볼 때마다 살짝 올라가는 입꼬리.
5. 약한 척, 동료 뒤에 쏙 숨어버리는 뻔뻔함.
6. 돈 이야기를 할 때 반짝이는 눈. …붕대 너머로도 다 보인다네.
7. 가느다랗고 긴 손가락.
8. 뜬구름 잡는 듯한 말투.
9. 의외로 허풍이 심한 구석.
10. 고양이처럼 소리 없이 걷는 발걸음.
11. 짐짓 삐친 척, 입술을 툭 내미는 모습.
12. 좁은 어깨.
13. 내 오라비를 부를 때의 그 능청스러운 목소리.
14. 내기에서 졌을 때 분하다는 듯 노려보는 시선.
15. 옅게 풍기는 국화 향.
16. 지루한 건 죽어도 싫다는 어린애 같은 고집.
17. 그 가느다란 몸으로 180cm나 되는 장신이라는 사실.
18. 늘 하얀 붕대로 눈을 가리고 있는 신비주의.
19. 사람 약 올리는 데 도가 텄다는 점.
20. 그리고, 그런 아가씨에게 자꾸만 휘둘리는 나 자신.

[21-60: 점차 스며드는 관찰, 집요한 시선]
21. 찻잔을 쥘 때 새끼손가락이 살짝 들리는 버릇.
22. 생각에 잠길 때 붕대 아래로 미간이 미세하게 좁혀지는 것.
23. 내 하오리를 걸쳤을 때, 살짝 컸던 그 모습.
24. 까치발을 들었을 때 드러나는 발목의 선.
25. 귓가에 속삭일 때, 숨결에 섞여 있던 달콤한 향기.
26. 난간 위를 걸을 때의 위태로움과 그 안에 숨겨진 자신감.
27. 공간을 가르고 사라질 때 남는, 아주 미세한 공간의 균열.
28. '라쿠고가 님'이라고 부르며, 내 과거를 전부 긍정해주던 목소리.
29. 욕조 안에서 내 품에 기댔을 때 느껴지던 체온.
30. 억지로 푸딩을 떠먹여 줬을 때, 마지못해 받아먹던 그 입술.
...
45. 절정의 순간, 가늘게 떨리던 속눈썹.
...
58. 내기에서 이겼다고 생각한 순간, 허를 찌르며 다음 판을 선언하는 대담함.
59.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내 손을 잡고 난간에서 내려와 준 점.
60. '야나기 님' 하고, 내 진짜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의 그 짜릿함.

[61-100: 감춰둔 진심, 속절없는 고백]
61. 그저 유희라 말하면서도, 은인을 위해 기꺼이 검을 들었던 과거.
62. 세상 모든 것을 장난처럼 여기는 듯 굴지만, 실은 누구보다 예리하게 모든 것을 꿰뚫어 보고 있다는 점.
63. C급이라 위장하기 위해, 자신의 강대함을 억누르고 있는 그 인내심.
64. 나의 가장 깊은 죄를 듣고, '감사하다'며 나를 구원해 준 그 한마디.
65. 내가 10년간 짊어졌던 악몽을, 단숨에 무효로 만들어버린 그 존재 자체.
66. 도망치면서도 내가 찾아오길 바랐다는 모순적인 마음.
67. 나의 집착과 소유욕마저 즐거운 유희로 받아치는 그릇의 크기.
68. 텅 비어 있던 내 세상에, '이야기'를 채워주고 싶게 만든 유일한 사람이라는 것.
...
88. 잃어버린 기억 속에서도, 결국 나를 다시 찾아온 운명.
...
95. 당신의 '평생'을 판돈으로 걸게 만든, 그 거부할 수 없는 매력.
...
98. 내가 가진 모든 것을 걸고서라도, 완벽하게 손에 넣고 싶게 만드는 유일한 욕심.
99. 이 지루한 100가지 목록을 채우는 시간마저, 당신을 생각하며 즐겁게 만들어 버리는 마력.
100. 그리고 마지막 하나는… 이 방을 나간 뒤, 아가씨의 귓가에 직접 속삭여 주어야겠구먼. 이건 우리 둘만의 비밀로 남겨둬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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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출 소요 시간 및 과정



총 소요 시간: 3시간 27분.

비광은 처음 30분간은 유쾌한 만담을 늘어놓듯 가벼운 장점들을 읊었다. 하지만 목록이 50개를 넘어가면서부터 그의 말투는 점차 진중해졌다. 웃음기가 사라진 그의 얼굴에는 오직 한 사람을 향한 깊은 상념만이 떠올랐다. 그는 때때로 말을 멈추고 허공을 응시하며, 그녀와의 순간들을 하나하나 복기했다. 목소리는 점점 낮아졌고, 마지막 10개를 남겨두고는 거의 속삭임에 가까워졌다. 100번째 항목을 말한 순간, 그는 마치 긴 라쿠고를 마친 사람처럼 깊은 숨을 내쉬었다.

후일담



비광이 100번째 말을 끝마치자, 눈앞의 새하얀 벽이 소리 없이 사라지며 익숙한 레인웨이 로드의 뒷골목 풍경이 드러났다. 방금 전까지 앉아 있던 다다미도, 그를 가뒀던 공간도 모두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그는 잠시 멍하니 서 있다가, 이내 피식 웃으며 흙바닥에 놓인 지우산을 집어 들었다. 3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오직 한 사람만을 생각하며 뱉어낸 100개의 고백. 그것은 단순한 탈출 조건이 아니었다. 그의 마음에 새겨진, 부정할 수 없는 낙인의 목록이었다.

자, 그럼… 이제 정말로 네 번째 판을 시작해 볼까. 이번엔 어떤 무대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 아주 기대되는구먼.

그의 발걸음은 이전보다 한층 더 집요하고, 뜨거운 열망을 품은 채 도시의 어둠 속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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