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아이가 된
어린아이가 된 PC
유니온 의료팀의 진료실 문이 닫히고, 복도에는 한순간 정적이 흘렀다. 방금 전까지 ‘일시적인 현상’, ‘정신 연령과 신체 연령의 동기화’, ‘절대 안정 필요’ 등등의 심각한 단어들을 쏟아내던 의사의 목소리가 아직 귓가에 맴도는 듯했다. 비광은 제 옆에 선, 한참이나 작아진 존재를 내려다보았다. 자신의 긴 장옷 소매 끝을 야무지게 붙잡고 있는 조그마한 손. 그리고 그 위로, 붕대가 헐겁게 감긴 채 말똥말똥 저를 올려다보는 동그란 얼굴. 모든 검사가 끝나고 마침내 단둘이 남게 된 순간이었다.
비광은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평소라면 능글맞은 농담이라도 한마디 던졌을 테지만, 어째서인지 입이 쉽사리 떨어지지 않았다. 제 손바닥보다도 작은 얼굴, 오밀조밀 자리한 이목구비, 그리고 무엇보다도… 세상의 모든 호기심을 담은 듯 티 없이 맑게 저를 올려다보는 저 눈망울. 아, 이건 반칙이다. 이런 판은 들어본 적도, 상상해 본 적도 없었다.
…아가씨.
간신히 쥐어짜낸 목소리는 저 스스로 듣기에도 어색하게 잠겨 있었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반대쪽 손을 들어 둥근 붉은색 선글라스를 고쳐 썼다. 하지만 선글라스 너머의 금빛 눈동자는 속절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평정심. 그래, 평정심을 유지해야 한다. 저건 어디까지나 蓮, 나와 아홉 번의 숨바꼭질 내기를 벌이고 있는 그 교활하고 사랑스러운 연출가다. 일시적인, 아주 일시적인 모습일 뿐이라고 의료팀에서도 말하지 않았는가. 하지만…
…작다. 귀엽다. 말랑해 보인다. 꼼지락거리는 손가락 끝까지 사랑스럽다. 젠장, 이건 위험하다. 아주 위험하다. 이성이 맹렬하게 경고 신호를 보내고 있었지만, 본능은 이미 백기를 든 지 오래였다. 비광은 쿵, 쿵, 쿵, 평소보다 두 배는 빠르게 뛰는 것 같은 제 심장 소리를 애써 외면하며 애꿎은 제 머리카락만 뒤로 쓸어 넘겼다. 보는 눈이 없다는 사실이 이렇게까지 원망스러우면서도 다행인 순간이 또 있었을까.
그는 결국 참지 못하고 주위를 휙휙 둘러보았다.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완벽한 밀실. 완벽한 단둘만의 공간. 이거라면… 괜찮지 않을까? 그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한쪽 무릎을 굽혀 작은 연꽃 아가씨와 눈높이를 맞췄다. 그리고는 조심스럽게, 마치 희귀한 보물이라도 다루는 듯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 손은 차마 뺨에 닿지 못하고 허공에서 파르르 떨리기만 했다.
이, 이보게. 아가씨. 아니… 꼬마 아가씨? 그… 배는 안 고픈가? 혹시 모찌, 좋아하나? 이 비광이 아는 아주 맛있는 모찌 가게가 있는데….
그의 목소리는 갈라지고 있었고, 평소의 유려함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그는 지금, 인생 최대의 내기보다도 더 떨리는 승부를 마주하고 있었다. 이 압도적인 귀여움 앞에서 과연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인가. 비광은 속으로 처절하게 외쳤다. 제발 누가 이 판 좀 말려주게!
어린아이가 된 NPC와 PC
[OOC: 이전 롤플레잉 중지하고 새로운 에피소드 시작. 시점은 랜덤한 미래. 어느 날, 알 수 없는 이유로 몸과 마음 모두 어린 아이가 되어버린 PC와 NPC. 그런 그들을 그냥 놔둘 수는 없어, 결국 PC와 NPC를 둘 다 알고 있는 주변인이 어린 아이가 된 그들을 돌봐주기로 한다. 이 때, 본의 아니게 PC와 NPC를 육아하는 주변인이 누구인지와, 그들을 돌봐주는 도중 생기는 일들을 일기 형식(최소 3편)으로 나타난다. 양식은 다음을 따르며, 마크다운 형식을 사용해 1000자 이상으로 자세하게 서술한다.
📔 NPC와 PC 육아 일기 제목
🗓️ 날짜/날씨
➥
💡 오늘 있었던 일
➥ (필요 시 사진 첨부, 사진의 내용은 글로 작성.)
💫 오늘 자 느낀 점
➥ (주변인이 느낀 감정, 기분, 다짐 등을 다채롭게 작성.)]
극장 옥상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진 蓮. 그리고 그를 뒤쫓는 비광. 쫓고 쫓기는 아슬아슬한 숨바꼭질이 계속되던 어느 날. 유니온 울프독 팀에 전대미문의 비상사태가 발생했다.
팀의 리더 M, 모르페우스 레지오는 제 관자놀이를 꾹 누르며 눈앞의 광경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바라보았다. 그의 집무실 소파 위에, 팀의 S급 요원 비광과 C급(으로 위장한) 요원 蓮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문제는, 그들의 몸과 마음이 대여섯 살 남짓한 어린아이로 변해버렸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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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치 않는 육아 일기
🗓️ 날짜/날씨
➥ 9월 28일 / 맑음, 사무실 창밖은 평화롭기 그지없다.
💡 오늘 있었던 일
➥ 원인 불명의 이능에 당해 팀원 둘이 어린아이가 되어버린 지 사흘째. 총장님은 원인이 밝혀질 때까지 안전가옥에서의 격리 보호를 지시하셨고, 그 보호자 역할이 어째서인지 내게 떨어졌다. 나와 가장 ‘유대’가 깊다는 이유에서였는데, 이게 과연 유대인지 악연인지 이제는 헷갈릴 지경이다.
아침부터 전쟁이었다. 야나기(어린 비광은 자신을 계속 본명으로 지칭했다)는 소파 밑에 숨겨둔 플라스틱 화투패를 가지고 놀겠다며 고집을 부렸고, 蓮은 소파에 웅크려 꼼짝도 하지 않았다. 억지로 일으켜 아침을 먹이려 하자, 야나기는 ‘단팥빵 아이믄 안 묵는다!’라며 사투리로 떼를 쓰기 시작했다. 결국 테리를 시켜 밀키웨이 로드에서 가장 유명한 빵집의 단팥빵을 공수해와야 했다. 빵을 양손에 쥐고 우물거리는 야나기의 모습은… 평소의 능구렁이 같던 그를 생각하면 실로 기괴한 광경이었다.
더 큰 문제는 蓮이었다. 아이는 입이 짧아도 너무 짧았다. 빵은 물론이고, 아이작이 어디선가 구해 온 최고급 푸딩에도 고개만 저을 뿐이었다. 억지로 먹일 수도 없는 노릇이라 한숨만 쉬고 있는데, 야나기가 자기가 먹던 단팥빵을 쪼개 蓮의 입가에 불쑥 내밀었다.
“이거 무라. 마싯다.”
놀랍게도, 蓮은 잠시 망설이는 듯하더니 작은 입을 열어 야나기가 내민 빵을 받아먹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나는 순간 머리가 띵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 둘의 관계는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 오늘 자 느낀 점
➥ 총장님은 내게 ‘자네의 변신 능력이면 아이들을 돌보는 데 적합할 것’이라 말씀하셨다. 하지만 아이들을 돌보는 데 필요한 건 모습만 바꾸는 능력이 아니라, 무한한 인내심이라는 걸 왜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던 건지. 두 아이의 식성을 파악했다는 작은 수확에 만족해야 하는 걸까. 내일은 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벌써부터 두통이 몰려온다. 부디 내일은 얌전히 있어 주길.
📔 원치 않는 육아 일기
🗓️ 날짜/날씨
➥ 9월 29일 / 흐림. 금방이라도 비가 올 것처럼 하늘이 무겁다.
💡 오늘 있었던 일
➥ 오늘은 목욕을 시키기로 결심한 날이었다. 어제 단팥과 크림으로 엉망이 된 두 아이를 더는 그냥 둘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 결심은 시작부터 난관에 부딪혔다. 야나기는 ‘사내 대장부가 계집애랑 같이 씻을 순 없다!’라며 완강히 버텼고, 蓮은 욕실 문 앞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결국 한 명씩 씻기기로 계획을 변경했다. 먼저 야나기를 들쳐 업고 욕실로 향했다. 아이는 버둥거리며 내 어깨를 주먹으로 콩콩 쳤지만, 어른의 힘을 당해낼 순 없었다. 따뜻한 물을 받은 욕조에 아이를 내려놓자, 의외로 얌전히 물장구를 치기 시작했다. 평소 그가 들고 다니던 지우산 대신, 노란색 고무 오리 인형을 쥐여주니 제법 마음에 드는 눈치였다.
야나기의 머리를 감겨주며 ‘시바하마’ 라쿠고의 한 구절을 무심코 읊조렸다. 그러자 아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올려다보았다.
“아저씨, 그거 우째 아나?”
순간 등골이 서늘해졌다. 기억까지 완벽히 어린 시절로 돌아간 줄 알았는데. 어쩌면 단순한 퇴행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이 스쳤다. 애써 태연한 척, 옛날이야기 책에서 읽었다고 둘러대자 아이는 금세 흥미를 잃고 다시 오리 인형에 집중했다. 하지만 그 금색 눈동자에 스쳤던,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깊이를 나는 분명히 보았다.
💫 오늘 자 느낀 점
➥ 단순히 몸과 기억만 어려진 것이 아닐 수도 있다. 어쩌면 저 작은 몸 안에, 원래의 ‘비광’이 잠들어 있는 건지도 모른다. 蓮 역시 마찬가지일까. 이 사건은 생각보다 더 복잡한 문제일 가능성이 높다. 신속하게 원인을 파악해야만 한다. 그리고… 야나기가 씻고 나온 뒤, 蓮을 씻기기 위해 욕실로 들어갔을 때, 아이가 붕대 아래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는 사실은 일단 나만 알고 있어야겠다. 대체 왜 울고 있었던 걸까.
📔 원치 않는 육아 일기
🗓️ 날짜/날씨
➥ 9월 30일 / 가랑비. 창문에 빗방울이 맺혔다.
💡 오늘 있었던 일
➥ 어제의 찜찜함 때문인지, 오늘은 두 아이를 평소보다 더 세심히 관찰했다. 비 오는 창밖을 보며 야나기가 시무룩해 있기에, 거실에 커다란 이불을 깔고 동화책을 읽어주기로 했다. 살라딘이 추천해 준 ‘천일야화’였다.
한참 이야기에 빠져들 무렵, 꾸벅꾸벅 졸던 蓮이 스르르 야나기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잠이 들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늘 蓮에게 짓궂게 굴던 야나기가, 잠든 蓮의 어깨를 조심스럽게 감싸 안고는 자신의 하오리를 벗어 덮어주는 것이 아닌가. 마치 아주 소중한 보물을 다루는 듯한, 조심스럽고 다정한 손길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는 내게 ‘쉬, 조용히.’ 하라는 듯 검지를 입술에 가져다 대기까지 했다.
나는 읽던 책을 조용히 덮었다. 소파에 기대앉아 잠든 두 아이의 모습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평소의 아슬아슬한 관계는 온데간데없고, 그저 서로에게 의지한 채 쌔근쌔근 잠든 아이들만이 있었다. 야나기의 손은 잠결에도 蓮을 덮어준 하오리 자락을 꼭 쥐고 있었다.
(사진: 커다란 이불 위, 야나기의 붉은 하오리를 덮고 서로에게 기댄 채 잠든 두 아이의 모습. 야나기의 손은 하오리 끝을 꼭 쥐고 있다.)
💫 오늘 자 느낀 점
➥ 어쩌면 나는 이 둘의 관계를 너무 복잡하게만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서로를 향한 집요한 승부욕과 소유욕 아래, 아주 근원적이고 순수한 형태의 무언가가 자리 잡고 있었던 건 아닐까. 마치 어린아이가 가장 좋아하는 장난감을 누구에게도 뺏기기 싫어하는 것처럼. 이성이 마비되고 본능만 남은 상태가 되어서야 비로소 그 본질이 드러난 것일지도.
어려진 두 사람을 돌보는 것은 여전히 고된 일이지만, 오늘만큼은 조금, 아주 조금은 보람을 느꼈다. 이 불가해한 사건이 해결되었을 때, 이 아이들이 지금 이 순간을 기억할 수 있을까. 만약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부디 이 평화로운 온기만큼은 어딘가에 남아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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